수양대군의 계유정란-제1회 사법시험-신민/통일당의원 전원 사퇴-이탈리아 독일에 선전포고


조선 세조의 화상으로, 화상 아랫부분에 해인사에 영정이 봉안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7_001_000_0050)>
 
1453  수양대군이 원로대신을 없애고 스스로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 일어남
1909  제1회 사법시험
1979  신민당 의원 66명과 통일당 의원 3명 전원 국회의원 사퇴서 제출
           10.4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변칙 처리에 항의

1943  이탈리아, 독일에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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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세조)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가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면 사직(社稷)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가겠다. 계속 만류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부터 목을 베겠다. ([연려실기술] 세조, 정난조)
 
피의 군주와 치적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수양대군.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편적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면서, 부친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의 이미지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 세종과 세종 비 심씨와의 사이에서 문종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차남이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文)에 몰두한 장남 문종,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달리 거침없고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의 존재를 걱정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친 사람은 부친인 세종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기 바랐지만, 수양대군의 속마음은 달랐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다
 
쿠데타의 최대 희생자인 단종은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아들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당장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불리는 기습 공격을 앞세운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무방비 상태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하였고 문인들의 신망을 받았던 라이벌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 버렸다. 당시 수양대군의 핵심참모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면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
쿠데타의 명분은 약했고,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이시애(李施愛)의 난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우익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세조는 김질과 성삼문을 불러 들였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인두질에 성삼문은 도모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대었다. 이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세조는 성삼문과 거사를 도모한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며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여섯 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은 자신과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가 세조실록, 조선 제7대 왕인 세조 재위 13년 3개월간(1455. 6.∼1468. 9.)의 역사를 기록한 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48)>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힌 이후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순흥에는 부사로 있는 이보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금성대군에게는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이 이보흠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동은 상전인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기회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이 작성해 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나 안동부사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고, 뒤에 이를 안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금성대군의 역모 사실을 알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단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었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했다. 순흥부는 단종의 신원이 복위되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었다.
 
세조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다 보니 문치(文治)보다는 패도(覇道) 정치로 변모해 갔다. 그 결과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서 불경 간행 등 공적도 남겼으나, 독단적인 정치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는 자신의 골육인 단종과 금성대군 등을 죽이면서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한명회·신숙주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이들의 권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도중 이시애의 난을 만나자 오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세조도 죽음을 예감하고 1468년(세조 14년) 음력 9월 7일 아들인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최고의 묘호를 받은 세조,
 
그 묘호에 담긴 뜻은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게 된다.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공적을 기리며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이른바 묘호(廟號)이다.
 
태조∙태종∙세종 등 역대 왕들의 묘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국왕의 묘호는 두 글자로 지어졌다. 첫 글자는 임금의 업적을, 두 번째 글자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컨대 나라의 창업자는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쓴다. 조(祖)는 주로 창업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이고 나머지 후대 왕들은 ‘종(宗)’자를 쓴다. 그런 이유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창업자나 그 4대조 외에 ‘조’자를 쓴 예는 거의 없었다.
 
세조의 경우도 원래 묘호로 거론된 것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그러나 세조라는 묘호는 후대 왕인 예종이 고집하여 결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세조는 개국자가 아닌 계승자이므로 ‘조’가 아닌 ‘종’을 쓰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계승한 왕이라는 ‘세(世)’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조(祖)’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되었다. 이런 경우는 세조 외에도 선조나 인조가 있는데 대체로 후대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결과라 볼 수 있다. 
 
글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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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 死六臣 ]
 
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 이후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당시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조성되어 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ㆍ권저(權著)ㆍ김문기(金文起)ㆍ박중림(朴仲林)ㆍ박기년(朴耆年)ㆍ박대년(朴大年)ㆍ박인년(朴引年)ㆍ박쟁(朴崝)ㆍ성승(成勝)ㆍ성삼고(成三顧)ㆍ송석동(宋石同)ㆍ심신(沈愼)ㆍ윤영손(尹令孫)ㆍ이유기(李裕基)ㆍ이의영(李義英)ㆍ이호(李昊)ㆍ이휘(李徽)ㆍ조청로(趙淸老)ㆍ최득지(崔得池)ㆍ최사우(崔斯友)ㆍ최치지(崔致池)ㆍ허조(許慥)ㆍ황선보(黃善寶)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종에 대한 충심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으며,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성승ㆍ유응부ㆍ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이용해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좁아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성삼문을 통해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ㆍ이개ㆍ하위지ㆍ박중림ㆍ김문기ㆍ성승ㆍ유응부ㆍ윤영손ㆍ권자신ㆍ박쟁ㆍ송석동ㆍ이휘 등은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사육신의 유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ㆍ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정조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배향(配享)하기로 하여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육종영(六宗英)이라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ㆍ화의군ㆍ한남군(漢南君)ㆍ영풍군(永豊君)ㆍ이양(李穰)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사의척(四懿戚)이라 하여 송현수(宋玄壽)부터 권자신(權自愼)ㆍ정종(鄭悰)ㆍ권완(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김종서ㆍ황보인ㆍ정분(鄭苯) 세 재상을 삼상신(三相臣), 민신(閔伸)ㆍ김문기(金文起)ㆍ조극관(趙克寬)을 삼중신(三重臣), 성승(成勝)ㆍ박쟁(朴崝)을 양운검(兩雲劒)으로 하였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ㆍ허조(許慥)ㆍ박계우(朴季愚)ㆍ이보흠(李甫欽)ㆍ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ㆍ불이문(不二門)ㆍ홍살문ㆍ비각(碑閣) 등을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ㆍ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金寧) 김씨(金氏)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ㆍ이개ㆍ유성원ㆍ박팽년ㆍ하위지ㆍ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두어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顯彰, 밝혀 나타냄)하기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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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충절을 계승한 생육신
 
1453년 수양 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단종은 형식상으로나마 왕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단종과 수양 대군의 불안한 동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455년 수양 대군의 핍박을 받은 단종은 결국 상왕으로 물러났고 수양 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였다. 역사 속에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사육신의 활동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성삼문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가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을 대개 사육신으로만 알고 있는 까닭은 바로 생육신으로 자처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은 자신의 문집인 『추강집』에 사육신에 관한 기록을 「육신전」으로 남겼고, 수양 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성리학의 이념인 충절과 의리가 한층 강화된 조선 후기 숙종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국가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김시습을 비롯해 남효온·원호·조려·성담수·이맹전·권절·정보 등 사육신의 충절을 따라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둔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다수 존재했다. 또한 숙종 연간에는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사육신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였고, 영조 연간에는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의 사당 옆에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사육신의 충절을 계승한 선비는 많았지만 사육신이 여섯 명인 만큼 앞서 언급한 여덟 명 중 권절과 정보를 제외한 여섯 명을 특별히 생육신이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김시습 시고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말을 알아듣고 두 돌에 시구를 지어 신동으로 각광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시습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전국을 유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원호는 원주의 남송촌에서 세상을 등졌다. 이맹전은 선산 강정리 전원에 묻혀 살았는데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려는 낙동(洛東)으로 돌아와 낚시질로 생을 마쳤는데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과 같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담수는 부친 성희가 성삼문의 역모 죄에 연좌되어 벼슬길이 막힌 채 죽자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살면서 한 번도 한양에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남효온은 「육신전」을 저술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적극적으로 세조의 비행을 고발한 인물이었다. 세조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체제 비판적 지식인의 행적을 기록한 「육신전」을 쓴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현대사에서 보면 전두환 군사 정권의 압제 시절인 1980년대 초반에 언론 통제의 벽을 뚫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록을 비밀리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출간한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생육신의 존재는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맞서 은둔과 울분으로 평생을 지낸 지식인이 다수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의 행적과 사상은 사림파로 이어지게 되고 사림파는 결국 훈구파를 대체하며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시습 등 생육신의 절의 정신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성장에 커다란 토양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개정증보판 2005., 2쇄 2013.,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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