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장군, 여진족 정벌 개시-여수반란 일어남 마산창원에 위수령-태국 구테타 시리트 정권장악


[출처: 국역고려사]
 
1107(고려 예종 2)  윤관 장군, 여진족 정벌 개시

1948  여순반란사건 일어남
1979  정부, 마산 창원에 위수령 발동
1958  태국에 무혈쿠데타, 샤리트최고사령관이 정권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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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尹瓘 ]
 
윤관(尹瓘)1)은 자가 동현(同玄)이며, 파평현(坡平縣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사람이다. 고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2)이 되었고 부친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냈다.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3)한 뒤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내다가 숙종 때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전임되었다.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靺鞨)에서 떨어져 나온 종족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뒤에는 취락을 이루어 산천에 흩어져 살아 그때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 중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삭주(朔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부근 지역의 거주민들은 간혹 귀부해와서 신민 노릇을 하다가도 곧 배반하곤 했다. 영가(盈歌)와 오아속(烏雅束)이 이어 추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게 되자 그 기세가 점차 강포해졌다.
 
이위촌(伊位村)의 경계에 있는 연산(連山)은 동해안에서부터 우뚝 솟아올라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에 이르러서는 매우 험준하고 거칠어 인마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그 사이에 소로 하나가 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병목[甁項]이라 부르는 바, 출입구가 하나 뿐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공로를 세우고 싶어하는 자들이 왕왕, 그 소로를 막아버리면 여진족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그때 군사를 동원해 평정하라는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
숙종 7년(1053) 여진이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 와서 진을 치니 혹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추장인 허정(許貞) 및 나불(羅弗) 등을 유인 체포해 광주(廣州)에 가두고 고문하였더니, 과연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음을 자백받고 그들을 억류해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4) 등이 “여진이 허약하니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빼앗지 않고 기회를 잃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또한 오아속(烏雅束)이 다른 부락의 부내로(夫乃老)와 틈이 생겨 군사를 동원해 그를 치느라, 국경 근처까지 와서 진을 치자, 왕이 임간(林幹)5)을 시켜 수비에 임하게 하였다.
임간이 공로에 눈이 팔린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 갔다가 도리어 패배하고 태반의 군사를 잃었다. 여진은 승세를 타고 정주(定州)의 선덕관성(宣德關城)에 난입해 수많은 인명과 재물을 죽이고 노략질해가자 왕은 윤관을 임간 대신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고 부월(鈇鉞)6)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그들과 싸워 30여 명을 죽였으나 아군도 반 넘는 군사가 죽거나 다쳐 사기가 꺾였으므로 윤관이 결국 자세를 낮추어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이에 분노한 왕이 천지신명에게, 만약 도움을 내려 적지를 소탕하게 해준다면 그 땅에 사원을 짓겠노라고 빌었다.
 
윤관이 참지정사(叅知政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옮기자 이렇게 건의했다.
 
“제가 보건대 적의 군세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성하니 군사를 쉬게 하고 양성하면서 뒷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제가 패한 까닭은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7)을 만들어 문산관(文散官)·무산관(武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과 복예(僕隸 : 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방행정 단위에서 말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신기군(神騎軍)8)에 소속시키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신보군(神步軍)·도탕군(跳蕩軍)·경궁군(梗弓軍)·정노군(精弩軍)·발화군(發火軍) 등에 소속시켰다. 20세 이상인 남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신보군(神步軍)에 소속시키고 서반(西班)과 각 진(鎭)·부(府)의 군사는 사시(四時)로 훈련하고, 또한 승도(僧徒)9)들을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삼는 한편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축적하면서 다시 공격한 전략을 세웠다. 이후 윤관은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예종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선왕의 상 때문에 군사를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2년(1107)들어 변방의 장수로부터 “여진이 강성해져 변방의 성을 침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추장이 호로박 하나를 꿩 꼬리에 달고서 각 부락에 회람시키면서 일을 의논하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오자 왕이 그것을 듣고 중광전(重光殿)의 불상을 안치하는 방에 감추어 두었던 숙종의 발원의 글을 꺼내다가 양부(兩府 :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대신들에게 보였다. 대신들이 받아 읽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선왕께서 남기신 뜻이 이와 같이 깊고 간절하시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다짐한 후 이어 글을 올려 선왕의 뜻을 이어 정벌할 것을 건의했다. 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를 시켜 태묘(太廟)10)에서 점을 치게 하여 감(坎)의 기제(旣濟)11)괘가 나오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결정12)하고서 윤관을 원수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윤관이,
 
“제가 진작 선왕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중한 어명을 받들었으니 삼군(三軍)13)을 통솔하여
 
 적의  성을 쳐부수고 우리의 강토를 넓혀서 반드시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오연총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미심쩍은 나머지 자기 생각을 가만히 윤관에게 말하자 윤관은 개연히
 
“공과 내가 아니면 누가 만 번이나 죽을 땅으로 나가서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겠소? 방침이 이미 결정된 마당에 무엇을 미심쩍어 하는거요?”
 
라고 말하니 오연총이 입을 다물었다. 왕은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위봉루(威鳳樓)에서 부월(鈇鉞)을 주고 그를 보내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쪽 국경까지 진군해 장춘역(長春驛)에 진을 치고서 17만 군 병력을 20만이라 칭했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14)과 황군상(黃君裳)15)을 각각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로 나누어 보낸 다음, 여진 추장더러 “우리나라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석방하려 하니 와서 우리조정의 명령을 듣도록 하라.”고 속이고서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 말을 믿고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오자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복병을 동원해 모조리 죽였다. 그 가운데 건장하고 영리한 오륙십 명은 관문까지 와서 의심하며 들어오지 않으려 하니,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16)·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요소마다 복병을 배치하게 하고, 또 최홍정으로 하여금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해 거의 다 잡아 죽였다.
 
윤관은 스스로 5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주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갔으며,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좌상시(左常侍) 문관(文冠)은 3만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다.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병부상서(兵部尙書) 김덕진(金德珍)17)은 4만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면)의 안해수(安海戍)·거방수(拒防戍) 사이로 나갔고, 선병별감(船兵別監)·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양유송(梁惟竦)과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圖) 등은 수군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면 부근)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니, 여진이 아군의 군세가 매우 성한 것을 보고 모두 달아나 가축들만 들에 널려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까지 가자 적은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
 
윤관은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18)과 최홍정으로 하여금 정예군을 거느리고 급습해 적을 패주시켰다.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당도해 여진이 집결해 진을 친 것을 발견하고, 통역 대언(戴彦)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게 했으나 여진은 “우리는 한 번 싸워서 승부를 낼 것이며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리고는 석성으로 들어가 화살과 돌을 빗발같이 쏘면서 저항하니 아군이 전진할 길이 없었다. 윤관이 척준경더러 “해는 저물고 전황이 위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자, 그는,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에서 공의 부하로 일하면서 실수로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는 저를 장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정에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하셨으니 오늘이야말로 제가 몸을 던져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고 다짐한 후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전공을 세운 척준경에게 능라 30필을 상으로 주었고, 또한 최홍정·김부필·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19)을 시켜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해 맞서 싸우는 적과 오랫동안 교전하다가 1천 2백 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중군(中軍)은 고사한촌(高史漢村) 등 35촌을 쳐부수어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우군(右軍)은 광탄촌(廣灘村) 등 32촌을 쳐부수어 290명의 목을 베고 3백 명을 사로잡았다. 좌군(左軍)은 심곤촌(深昆村) 등 31촌을 쳐부수어 950명의 목을 베었으며, 윤관의 부대는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으로부터 37촌을 쳐부수어 2,120명의 목을 베고 5백 명을 사로잡은 후 녹사(錄事) 유영약(兪瑩若)을 보내 승전을 보고하였다. 왕은 기뻐하며 유영약에게 7품 벼슬을 내려 주고, 좌부승지(左副承旨)·병부낭중(兵部郞中) 심후(沈侯)20)와 내시(內侍)·형부원외랑(形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21)편에 조서를 내려 두 원수와 여러 장수들을 격려했으며 차등을 두어 선물을 하사했다.
 
윤관은 다시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국경을 분명히 규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화곶령(火串嶺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동쪽에 있는 고개),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22)를 시켜 몽라골령 아래지세를 살펴 성랑(城廊) 950간을 쌓아 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라고 하고, 화곶령 아래에 992간을 쌓아 웅주(雄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라고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을 쌓아 복주(福州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라고 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간을 쌓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라고 하고, 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동보제사(鎭東普濟寺)를 영주의 성 안에 창건하였다.
 
이듬해(1108)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군 8천명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 병목[甁項]의 소로로 진군했는데 적이 울창한 숲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부대가 오는 것을 기다려 급습하니 아군이 전멸하고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척준경(拓俊京)이 용맹한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려 했다. 그 동생인 낭장(郎將) 척준신(拓俊臣)23)이 “적진이 견고해 쳐부술 수가 없으니 헛되이 죽으면 무엇이 이롭겠습니까?” 하고 말렸으나 척준경은 “너는 돌아가서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해야하지만 나는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의리상 그만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큰 함성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 10여 명을 쳐 죽였다. 최홍정·이관진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에 나섰으며 포위를 풀고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해 36명의 목을 베었다. 윤관이 해가 저물어 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성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면서 척준경의 손을 잡고 “이제부터 내가 너를 아들 같이 여길 것이니 너는 나를 아비와 같이 여기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어명에 따라 그를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였다.
 
추장 아로환(阿老喚) 등 403명이 아군의 진영 앞으로 나와 항복을 청하고, 남녀 1,460여 명도 좌군(左軍)에 항복했다. 이 때 적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영주의 성 남쪽에 진을 친 후 크게 고함을 지르며 도전해 오자, 윤관이 임언(林彦)과 “중과부적이니 맞싸워서는 안되며 굳게 지켜야만 한다.”고 말했으나 척준경은 반대하였다.
 
“만약 나가 싸우지 않았다가 적의 병력이 갈수록 증가하고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며 외부의 원병까지 오지 않으면 우리는 고스란히 죽을 것입니다. 전날 싸움에 이긴 것을 공이 이미 보셨으나 오늘 또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테니 공들께서는 성에 올라가 구경하시오.”
 
이어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에서 나가 싸워 19명의 목을 베니, 적이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척준경이 북을 치고 피리를 울리며 개선자, 윤관 등이 망루에서 내려와 영접하고는 손을 잡고 서로 절하였다.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장수들을 거느리고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에서 집결했는데,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嶮城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 추장 사현(史現)의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싸움에 지고 말까지 빼앗기자 척준경이 바로 정예병을 데리고 가서 구원하고, 적을 격퇴시킨 다음 말까지 되찾아 왔다.
 
여진의 군사 수만이 와서 웅주(雄州)를 포위하자 최홍정이 군사들을 타일러 다들 싸우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네 문을 열고 몰려 나가 힘껏 싸워 적을 격파했다. 80여 명을 사로잡아 목 베었고, 병차(兵車) 50여 량과 중차(中車) 2백 량, 말 40필을 노획했으며, 그 나머지 병장기들은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때 척준경은 성 안에 있었는데 고을 수령이,
“성을 지킨 날이 오래되니 군량이 다하려 하고 밖에서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공이 만약 성에서 나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으면 군사들이 한 사람[噍類]24)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고 말했다.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윤관은 또 영주·복주·웅주·길주·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군) 및 공험진에 성을 쌓고, 드디어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고는 그의 아들 윤언순(尹彦純) 편에 다음과 같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성군의 덕이 진실로 하늘과 땅과 같아 인의(仁義)의 군사가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니, 장수와 군사들이 기쁜 함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동여진(東女眞)은 깊숙한 지역에 잠복하면서 더러운 자기 무리들을 번식시켰습니다. 조상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택을 입어 왔으면서도, 이리와 같은 탐욕으로 차츰 반역의 마음을 길러 왔으며 우리 영토 밖에서 개처럼 짖어대면서 관문과 요새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약탈하였습니다. 관대한 조치에 길이 들어 막말을 하고 우리를 깔보았으며, 제멋대로 야욕을 품고서 우리가 자신들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황(先皇 : 숙종)께서는 분노하시며 정벌을 계획하셨으며, 폐하께서 그 뜻을 이어서 정벌을 도모하셨으나 그 위험을 감안해 당초 시행을 꺼렸고, 의논도 여러 가지였으므로 결국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적정을 얼마나 잘 아느냐 하는데 있으며 임기응변 하려면 무엇보다 적절한 시기가 중요한 법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가 다가온데다가 성군의 예지가 홀로 빛나시어, 먼저 우리 군사들을 쉬게 하여 정벌에 동원할 적절한 시기를 살피시면서 적들의 허실을 알 수 있게 반드시 적을 사로잡아 정보를 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원수(元帥)인 저에게 적을 모두 섬멸하라고 명령을 내리시니 저는 지휘권[節鉞25)]을 위임받아 마침내 정벌에 나섰습니다. 군사들의 기세가 떨쳐 적을 압도하니 마치 큰 강물이 골짜기로 쏟아져 들어가 한 치의 아교로 막을 수 없는 것 같았고, 숫돌이 산봉우리에서 굴러 떨어져 빈 알은 깨어지는 것 같았으니 사로잡은 적이 5천 명을 넘고 죽인 적은 5천 명에 가까우며, 쌓아두었던 곡식이 마을마다 흩어지고 달아나는 사람은 도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적지는 지세가 험준해 방어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들판과 밭이 기름지고 수량도 풍부한 곳이라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였으나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늘의 덕택으로 그 땅을 취했으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 감사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해묵은 수치를 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주나라 왕이 험윤(玁狁)26)을 친 일과 한나라 황제가 흉노(凶奴)를 친 일은 강토를 개척하고 백성의 피해를 없앴던 쾌거였으나 그것조차 오늘의 승리에 비교하면 하찮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의 얕은 지혜와 둔한 재질에서 이룩된 것이겠습니까? 이야말로 폐하의 거룩한 계책과 신령스런 전략으로 조정에 앉으신 채 먼 변방을 안정시키신 결과이니 진실로 그렇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이루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사에 기록함으로써 청사에 그 업적이 빛나게 하옵소서.”
 
왕이 내시(內侍) 위위주부(衛尉注簿) 강영준(康英俊)27)을 보내 윤관 등에게 양과 술을 하사하고, 아울러 군인들에게도 은사라(銀鐁鑼)28) 1개와 은병(銀甁)29) 40개를 내려주었다.
 
윤관은 또 임언을 시켜 전적을 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관청의 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게 하였다.
 
“『맹자(孟子)』30)에는 ‘약한 것은 본래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본래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이 말을 외운지는 오래 되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그것이 참말임을 믿게 되었다. 여진은 우리나라보다 군세에서 약하고 인구가 적은데도 호시탐탐 변방을 엿보다가, 숙종 10년(1105)에 틈을 타 병란을 일으켜 우리 백성을 많이 죽였고 또 많은 사름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
 
숙종께서 대노해 군사를 정비하여 대의로써 토벌하려다가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어 상복을 입으신지[亮陰31)]하기 3년 만에 대상(大祥)과 담제(禫祭)32)를 마치시고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진은 본디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 개마고원(盖馬高原)의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물[貢職]을 바쳤으며 역대 조종의 은택을 크게 입어 왔는데도 하루 아침에 의리에 어긋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셨다. 내 듣건대 옛 사람이 말하는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잇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내가 지금 다행히 삼년상[達制33)]을 마치고 나라 일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한 것들을 쳐서 선왕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수사도(守司徒)·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오연총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예병 30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게 하였다.
 
윤공(尹公)은 그 업적이 빼어난 분으로 일찍이 김유신(金庾信)의 사람됨을 흠모한 나머지 ‘김유신이 6월에 강물을 얼게 해 삼군을 건너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일 뿐이다. 나 또한 어찌 그렇게 못할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하곤 했으며, 과연 지극한 정성에 감응해 신이한 행적을 여러 차례 들렸다. 오공(吳公)은 지금 사람들이 시대가 존중하고 우러러보는 분으로 타고난 성품이 신중하여 일에 맞닥뜨리면 반드시 세 번이나 생각하였으므로 뛰어난 수단과 큰 계책이 시행되면 적중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두 공이 진작 이번 정벌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분부를 듣자 분연히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출병하는 날에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나서 군영에서 맹약의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모든 명령을 받들겠노라고 맹세했다. 적진으로 진격하자 삼군이 분격해 일당백으로 싸우니 마치 마른 가지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이 전투에 승리했다. 죽임을 당한 자가 6천여 명이고 자진해서 무기를 반납하면서 항복해온 자들이 5만여 명이었으며, 싸움터의 먼지만 바라보고도 정신을 잃고 북쪽 끝까지 달아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아!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여진이 자신들의 군사상의 열세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 지역은 3백 리로서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개마산(盖馬山)34)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해 있으며,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할 만하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그 옛 비석35)의 유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께서 되찾은 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새로 6성을 쌓았으니, 첫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府)로 군사와 백성이 1,948정호(丁戶)이다. 둘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군사와 백성이 1,238정호이다. 셋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군사와 백성이 1,436정호이다. 넷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군사와 백성이 680정호이다. 다섯째는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군사와 백성이 632정호이다. 여섯째는 공험진방어사(公險鎭防禦使)로 군사와 백성이 532정호이다. 이어 덕망이 높아 세상에 뚜렷하고 현명한 재능이 있어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땅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시경(詩經)』에서 읊은 바36) ‘울타리 되고 담이 되어 왕실을 지키네.’라고 한 말과 같이, 이제는 편안히 베개를 높이 베고 전쟁에 대한 근심[東顧之憂37)]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원수(元帥)가 나에게 ‘옛적 당나라 재상 배진공(裵晋公)이 회서(淮西)로 출정하여 공을 이루자, 비장(裨將)인 한유(韓愈)가 그를 위해 비문을 지어 그 일을 널리 알렸다. 이에 따라 뒷사람이 헌종(憲宗)의 출중하고 위대한 덕을 알아 노래로 칭송하였다. 그대가 다행히 나에게 종군했으니, 그 시말을 자세히 기록한 기문(記文)을 지어 우리 성스러운 조정의 전대미문의 위대한 공적을 무궁토록 전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당부하기에 나 임언(林彦)은 명을 받들고 붓을 잡아 이를 기록한다.”
 
윤관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여 마리를 바쳤으며, 의주(宜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덕원)·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 및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군)·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아 북계(北界)의 9성으로 하고, 모두 남계(南界)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왕은 윤관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로, 오연총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면서, 내시낭중(內侍郞中) 한교여(韓皦如)를 시켜 조서와 직첩 및 붉게 수놓은 안장 일체와 마구의 말 2필을 가지고 웅주로 가서 나누어 주게 했다.
 
개선하자 왕은 군악대와 호위대를 갖추어 영접하게 했으며,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와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시켜 도성 동쪽 교외에서 위로연을 베풀게 했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景靈殿)으로 나아가 복명하고 부월(鈇鉞)을 바쳤으며 왕은 문덕전(文德殿)에서 그들을 접견하고, 한밤까지 변방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얼마 뒤 여진이 또 웅주를 포위하자 왕은 오연총을 보내 구원하게 하고, 다시 윤관을 보내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이 적의 수급 31개를 바치니 얼마 뒤에 윤관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으로 삼고 식읍(食邑) 2천 5백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호를 주었으며, 오연총은 양구진국공신(攘寇鎭國功臣)으로 올려주었다.
 
또 이듬해(1109)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했는데 오연총이 그들과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자, 왕은 다시 윤관을 보내 구원하게 하면서 근신들로 하여금 금교역(金郊驛 :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 강음)까지 전송나가게 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길주로 진군하다가 나복기촌(那卜其村)에 당도하자, 함주사록(咸州司錄) 유원서(兪元胥)38)가 달려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여진의 공형(公兄)인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이 우리 성문을 두드리면서 ‘우리들이 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갔더니 태사(太師) 조아속(鳥雅束)이 화친을 청하려고 나로 하여금 그 뜻을 고려 병마사(兵馬使)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가 교전 중이라 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사람을 우리가 있는 곳에 보내면 태사(太師)의 말을 상세히 전달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윤관 등이 그 보고를 듣고 도로 성으로 돌아왔다가, 다음날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진에 보내어 여진 장수 오사(吳舍)에게 “강화는 병마사(兵馬使)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공형(公兄) 등을 우리 조정으로 보내 직접 임금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라 말하게 하니 오사(吳舍)가 크게 기뻐하였다.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이 다시 함주(咸州)로 와서,
 
“우리들은 고려 조정에 입조하기를 바라지만 지금 전투가 진행 중이라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관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관료를 인질로 교환합시다.”
 
고 제안했다. 윤관이 공옥(孔沃)·이관중·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보내자 그제야 요불(褭弗) 등이 와서 9성 지역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甁項]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나라에서 여러 차례 군사를 징발하자 온 나라가 소란해졌으며 더욱이 기근과 역병으로 원망이 일었고 여진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에 왕은 신하들을 모아 의논한 후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병장기와 군량은 내륙으로 운반한 다음 그 성을 없애버렸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 및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서 왕과 면대하고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39)하자, 왕은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보내 두 사람이 귀환하는 도중에 지휘권을 박탈했으므로, 윤관 등은 복명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이 그들을 치죄하라고 건의했으며, 간신(諫臣)인 김연(金緣)·이재(李載) 등은 대궐문 밖에 엎드려,
 
“윤관 등이 제멋대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패전하고 나라에 피해를 입혔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하옥시키소서.”라고 강경하게 간쟁했다.
 
왕이 심후를 시켜, “두 원수는 명을 받들어 출정한 것 뿐이며, 예로부터 전투에는 승패가 있게 마련이니 어찌 죄가 되겠는가?”라고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김연 등이 계속 간쟁하는 바람에, 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공신의 칭호도 박탈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윤관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병부사(判兵部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로 임명하자, 윤관이 표문을 올려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짐이 듣건대 옛날 이광리(李廣利)40)가 대완(大宛)41)을 정벌하고 나서 겨우 준마(駿馬) 30필을 노획해왔는데도 무제(武帝)는 아득히 먼 곳을 정벌했음을 감안해 그 과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진탕(陳湯)42)이 질지(郅支)를 죽일 때는 임금의 명령이라고 꾸며대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선제(宣帝)는 위세를 온 오랑캐에게 떨치었다고 하여 제후로 봉하였다.
 
경이 여진을 친 것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선왕을 잇겠다는 과인의 뜻을 헤아려 한 일이다. 몸소 칼날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으며, 1백 리의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나라의 오랜 치욕을 씻었으니 경의 공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오랑캐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배반을 밥 먹듯이 하는데다 그 나머지 무리들이 근거지가 없어진지라, 추장들이 항복하는 글을 바치고 화친을 간청해 왔기에 신하들이 다들 다행이라 여겼고 짐 역시 불쌍히 생각해 그 땅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뒤에 해당 관청에서 법을 들어 탄핵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관직을 박탈하긴 했으나 짐이 끝까지 경을 허물하지 않은 것은 맹명(孟明)43)이 다시 강을 건너 전공을 세운 것처럼 다시 공을 세우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짐이 경에게 주는 관작도 경의 본래 벼슬이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경을 아끼는 짐의 마음을 헤아려 속히 벼슬에 나아가도록 하라.”
 
윤관이 두 번 표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예종 6년(1111)에 죽으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윤관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상(將相)이 되자 비록 군중(軍中)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경(五經)44)을 가지고 다녔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겨 당대에 으뜸가는 명망을 얻었다. 인종 8년(1130) 예종의 묘정에 배향하고 수릉(綏陵)45)의 휘(諱)를 피하여 시호를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아들46)은 윤언인(尹彦仁)·윤언순(尹彦純)·윤언식(尹彦植)·윤언이(尹彦頤)·윤언민(尹彦旼)이며 아들 둘은 승려가 되었다.
 
윤언순(尹彦純)은 예종 때 시어사(侍御史)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러 요나라에 갔는데, 당시 금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귀국 길이 막히고 또 고영창(高永昌)이 반란47)을 일으켜 동경(東京)에 웅거하는 통에 서방(徐昉)·이덕윤(李德允)48) 등과 함께 고영창에게 잡혀버렸다. 고영창이 자신에게 표문을 올려 하례하라고 강요하자 윤언순은 절개를 굽히고 하라는 대로 했다가, 귀국 후에도 비밀에 붙이고 자백하지 않았다가 탄로나는 바람에 해당 관청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처벌당했다. 벼슬은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다. 윤언식(尹彦植)은 천부적인 자질이 고상하고 우아하여 손님들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은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윤언민(尹彦旼)49)은 슬기롭고 민첩한 것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서화를 잘 하였다. 인종 때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었다.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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