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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 [ 金活蘭 ]
이칭별칭 호 우월(又月)
유형 인물
시대 현대
출생-사망 1899년 ~ 1970년
성격 교육자
출신지 인천
성별 여
1899∼1970. 교육자.
개설초명은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은 헬렌(Helen). 인천 출신. 평안북도 철산의 중농(中農)이었다가 개항된 제물포로 옮겨 창고업자가 된 아버지 진연(鎭淵)과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박또라[朴萄羅]의 2남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여덟살 때 인천 영화소학교(永化小學校)에 입학하였다가 아홉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서울로 이사하면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였다. 이화학당의 초·중·고등과를 거쳐 1918년에 대학과를 졸업,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그 뒤 이화학당의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재직중 한국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치(Welch,H.)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에 편입, 철학·교육학·웅변학 등을 공부하였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그 해 9월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1925년 6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하였다. 1930년 다시 도미하여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1931년 10월 우리 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 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이었다. 이 논문에서 일제의 지배하에 있는 한국인의 참된 자주성 확립과 자각은 경제생활 속에서 정신적으로 각성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931년 6월에는 덴마크인의 경제부흥에 관한 ≪정말인(丁抹人)의 경제부흥론≫을 저술하여, 당시 한국사회와 유사하게 경제적·정신적으로 침체되었던 덴마크가 어떻게 부흥하게 되었는지를 알렸다. 책의 결론에서 우리 민족에게 전민족의 정신쇄신, 민중교육의 중요성, 협동조합운동의 발흥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에 협동조합운동이 새롭게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1928년 미국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였을 때, 당시 미국에는 불경기가 심하여 외국선교사업을 축소시키기로 하고, 우리 나라에 주재하던 주교를 없애고 다른 나라의 주교가 이를 겸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긴급발언권을 얻어 감동적인 연설을 함으로써 총회가 방금 가결한 것을 번복, 우리 나라에 독립된 주교를 계속 주재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부터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일생 동안 교회의 국제회합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국제회의에서 우리 민족을 대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3년에는 김필례(金弼禮)·유각경(兪珏卿)과 더불어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하였고, 1924년 세계대회에 가입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남존여비의 인습 때문에 언제나 뒷전에 머물러 있었지만, 여성단체인 YWCA가 국내에서는 먼저 창설된 남성단체인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보다 세계대회에 먼저 가입함으로써 우리 나라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고 그 역량을 과시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 여성의 발언을 발표하기 위하여 ‘여성이여 어서 앞으로 나가자!’라는 구호를 내세운 잡지 ≪여론≫을 처음으로 발간하였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죽었을 때 이화학당 학감으로 있으면서 이화의 전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해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望哭)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인습적 제약과 구속을 타파하기 위하여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하였다.
1926년 학감에서부터 시작, 부교장을 거쳐 1939년 아펜젤러(Appenzeller,H.G.)의 추천을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는 교육기관의 책임자로서 자기의 뜻대로 교육사업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능동적으로 환경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교육목표를 가지고 교장직에 임하였다.
일제의 민족탄압이 더욱 극심해진 민족항일기의 말기에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지하로 잠적하였으나, 최후의 일각까지 신념대로 행동하겠다는 각오로 농촌개발운동에 더한층 정열을 쏟았다.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특히 축산을 통한 부업과 식생활에서의 영양섭취의 장려, 문맹퇴치 등에 중점을 두었다. 농한기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각 지방에서 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심훈(沈熏)이 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최용신(崔容信)으로 하여금 수원 샘골에 농촌아동교육시설을 갖추게 하였으며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교육정책 수립을 위해 구성된 교육심의회의 위원으로 교육이념분과에 참여하였고, 그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는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의 이념 확립에 공헌하였다. 또한 YWCA를 재건하고, 한국여학사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토로하였으며, 국민의 절대다수가 공산주의를 결사반대한다고 호소하였다.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총회 한국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하여 외교역량을 발휘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전시내각의 공보처장을 지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코리아타임스 The Korea Times≫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여 국민홍보외교활동을 하였다. 이 밖에도 국민홍보외교동맹을 조직하여 참전국과의 민간외교 및 외국참전병들의 위문 등 전시국가의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1965년 9월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1970년 죽을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1963년에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고,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임종 전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부탁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례식을 음악회로 대신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황민화운동과 내선일체운동, 그리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과거 일제강점기에 그의 친일행각이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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