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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美 씰 제6부대 창설 사령관, 리차드 마르신코 81세에 영면
![]() 라차드 마르신코는 미국 해군에 있는 동안 메들 (메달)과 표창장을 30회 이상 받았다. IMAGE SOURCE,GETTY IMAGES
BBC 원문 5시간 전 [시사뷰타임즈] 81세로 사망한 리차드 마르신코는 미군 증에서도 최강특수군 부대들 중의 하나이며 나중에 오사마 빈 라덴을 상대로 치명적인 급습작전을 수행했던 씰 제6부태 창설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비엣남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그는 창설 후 초기 3년 동안 이 부대를 이끌었으며 미 해군에 있는 동안 메들 (메달) 과 표창장을 30회 이상 수상한 바 있었다. 그의 단도직입적이면서도 거친 지도력은 대단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종종 상관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부는 그를 씰 제6부대에 무모한 “악동” 문화를 부추겼다고 비난한다. 전장 (戰場) 을 떠나자, 그는 법적 싸움에 봉착했고 미국 정부 돈을 사취했다는 혐의로 잠시 징역을 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르신코는 냉전 말미에 미국의 대-테러 능력을 신장시킴에 있어 필수적 역할을 했다. 그의 과장이 섞인 성격과 자서전 ‘불한당 전사’ 는 씰 제6부태를 군의 전톰문화이자 대중문화로 확고히 함에 도움을 주었다. ‘난 전쟁을 잘한다’ 마르신코는 1940년 펜설베니어 주의 작은 광산촌인 랜스포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슬로바키아와 헤르제고비나 출신의 이민자들이었고 그의 가족들 중 모든 남자는 모두 광부들이었다고, 마르신코가 자서전 블한당 전사에서 회고했다. “삶은 단조로우면서도 힘들었기에, 난 가족 중의 누군가가 지신의 혼자 힘으로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스스로 편상화의 가죽끈을 동여매고 새로운 생활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대개는 너무 가난해 신발을 살 수도 없었다.” 고 적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마르신코는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려 해보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8세에 미 해군에 입대한 뒤, 그는 1967년 씰 제2부대와 더불어 장교로 비엣남에 배치됐다. 전투를 하는 동안, 마르신코는 비엣남 용맹 십자상을 목에 걸었고 최초로 별 넷 청동성장 (星章; 공중전 이외의 용감한 행위를 한 군인에게 수여) 을 수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북 비엣남 (월맹) 은 자신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었는데, 그런 것이 전장에서 자신의 성공이었다고 했다. 그는 한 때 ‘사람들의 잡지’ 에 자신은 “전쟁에 능하다.” 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비엣남에서 조차도, 나의 이러한 본성이 내가 원하는 만큼 적을 많이 잡아서 죽이지를 못하게 했다.” 고 했다. 술집 싸움 및 제독 납치 2년 간 비엣남에 있는 동안, 1974년에서 1976년 사이에 미국과 캠보디어 (캄보디아) 에 배정된 마르신코는 자신의 옛 부대인 씰 제2부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980년, 미국은 ‘독수리 발톱’ 이라고 명명됐던 실패한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인질로 잡혀있는 미국인 53명을 구조하라는 것이었다. 큰 낭패를 볼 것을 고려하여, 마르신코를 해군 대-테러 전담 새로운 부대의 사령관에 마르신코가 선정됐다. 단 두 곳의 씰 (바다, 공중, 그리고 육지) 부대가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마르신코는 자신의 새로운 씰을 제6부대라고 부르면서, 이 부대의 규모에 대해 젖국들이 혼동에 빠뜨리길 바랐다. 그는 새로운 부대를 강력하게 훈련시키면서, 자신의 부대에 미국 해병대 전체보다 더 많은 탄약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제반 규정을 무시한다는 평판을 얻으면서, 군 공동체 내에서 씰 제6부대가 독자적이라는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불한당 전사에서, 그는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그리고 때로는 술집 싸움에 돌입하는 것이- 부대원 결집력에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부대의 “악동” 문화는, 씰 제6부대에 하급 장교로 가세했고 나중에 오사마 빈 라덴 급습작전을 2011년에 주도했던 윌리엄 맥레이븐 (현재 제독)을 포함하여, 군의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건 아니었다. 이 하급 장교는 그의 부대를 그때 그때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불평했고 일시적으로 이 부대에서 밀려나기도 했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마르신코는 자신이 하는 작업으로 칭찬을 받으며 3년 동안 이 부대를 이끌었는데, 당시엔 2년 간 사령관 역할이 표준이었다. 씰 제6부태에서의 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해군에서 또 다른 특수 부대를 창설하라는 신임을 받았는데, 새 부대 명칭은 ‘붉은 세포’ 였고 군 보안과 정보 부대들을 검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부대는, 다른 것들 중에서도, 대통령 전용기 근쳐에 폭탄을 심고 핵 잠수함 기지에 가까스로 잠입했다. ‘성공을 위한 수그러들지 않는 동력’ 마르신코는 1989년에 해군에서 은퇴했고, 나중에 붉은 세포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했던 것들 때문에 법적 문제에 봉착했다. 1990년, 그는 수류탄 계약에서 정부 돈을 사취했다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최초에 21개월 징역형을 받았지만, 15개월 후에 석방됐다. 1992년, CBS 방송국에 자신의 붉은 세포 공적이 미 해군 관계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찝히게 된 것이었다고 했다. 붉은 세포를 이끌라고 마르신코를 선정했던 마르신코제독 제인스 라이언스는 앙갚믐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는 ‘사람들 잡지’ 라는 곳에 “붉은 세포는 좋은 것이라는 게 일반적 의견이었고, 마르신코는 망가드릴 수도 있었다.” 고 했다. 자서전 불한당 전사는 수백만 권이 팔렸다. 마르신코는 군사 공상 소설작품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으며, 개인 보안 회사를 운영했고 레디오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24를 비롯한 영화 및 TV쇼 상담역으로도 일했다. (사용자 본인이 총 쏘는 사람이 되는) 1인칭 불한당 전사 총격 영상 게임이 2009년에 나왔는데, 마르신코가 주인공이었고 음성은 남자 배우 믹키 로크가 맡았다. 이 영상게임은 비평가들로부터 역대 최악의 게임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어떤 범주에서는 인격을 양극화시키고 있지만, 마르신코는 미군과 미군의 대-테러 능력에서 부인할 수 없는 표지로 남아 있다. 제독 맥레이븐은 뉴욕 타임즈지에 “어느 정도 의견 불일치가 우리에게 있었지만, 난 항상 마르신코의 대담성, 그의 기발함 그리고 그의 성공을 향한 수그러들지 않는 동력을 존중했었다.” 고 하면서 “난 그가 씰 공동체에 수도 없이 공헌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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