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 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는 점은, 그에게는 도무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는 “무솔리니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고,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다가,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다. 그 자신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파시즘은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이탈리아의 불안
 
1870년, 중세 이래 천 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던 이탈리아는 마침내 통일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통일이고,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공업화된 북부와 농업 위주의 남부 사이의 대립을 비롯해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지역들의 갈등과 격차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트렌토와 트리에스테 등이 미수복 상태였다. 이탈리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저항을 계속하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도 골칫거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달성한 독일과는 달리, 늘 허약함을 면치 못했던 군사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틈타 베네치아를,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와중에 로마를 병합하기는 했으나 모두 군사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넓은 해외 식민지를 갖지 못했고, 1896년에는 에티오피아를 차지하려다 실패하여 근대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 국가와 겨루어 패배한 유일한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본래 독일, 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물러나고, 뒤늦게 연합군에 참여함으로써 일부 미수복 지역을 차지하는 등 성과는 얻었다. 하지만 역시 군사적으로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점은 미미했으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강요받았다 여긴 독일 국민과 비슷하게,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도 마음의 앙금을 갖게끔 헸다.
 
전쟁의 후유증도 심각했다. 전시의 경제체제가 평상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빚어졌고, 이는 소련의 성립과 함께 이탈리아 사회주의가 급속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파업이 잇달았으며, 종전 이후 처음 실시된 1919년 1월의 총선에서는 사회당이 제1당으로 떠올랐다. 정권은 여러 자유주의 정당들이 합쳐 과반수를 얻은 연립정권에게 돌아갔지만, 이탈리아의 자본가와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기세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우파 정당들은 리더십이 없고 중구난방이었으며, 교황이 후원하는 인민당처럼 지나친 복고주의 정당까지 끼어 있었다. 그들은 난국을 타개하고 공산화의 악몽을 막아줄 새로운 정치세력을 애타게 찾았다.
 
그때,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에 편승한 유명한 문학가 단눈치오가 대전 참전군인들을 이끌고 미수복 지역 중 하나인 유고슬라비아령 피우메를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1919년 9월). 이들의 행동은 즉흥적이고 낭만적인 것이어서 19개월 만에 덧없이 끝나 버렸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무솔리니와 파시즘이 나타날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혁명가가 된 악동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29일에 이탈리아 북동부 로마냐의 프레다피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대장장이이며 미하일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맏아들의 이름도 멕시코의 혁명가 베니토 후아레스를 따라 베니토라고 지었다. 반면 어머니 로사는 신앙심이 독실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린 베니토는 아버지의 대장간에 놀러 가서 혁명가들의 영웅담을 듣는가 하면, 집에서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베니토는 사고뭉치였다. 툭하면 친구들과 싸웠고 선생에게도 대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으며,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집중할 줄도 알아서, 사범학교를 나와 몇 달 동안 초등학교 교사 일을 했으며 독학으로 중등학교 교사자격증도 땄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라던 길로 가는가 싶기도 했던 베니토의 선택은 결국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른 혁명가 쪽이었다.
 
그는 스물한 살이던 1902년에 스위스로 갔는데, 병역 기피 때문이라고도 하고, 무작정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 것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곳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사회주의 신문에 글을 쓰고 대중 강연도 할 기회를 얻었다. 그쪽에서 타고난 재능을 보인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청년 혁명가로 점점 명성을 올리게 된다. 그는 글에서나 연설에서나 단순 과격한 주장을 내세웠으며, 복잡한 이론보다 감정을 흔드는 말솜씨와 제스처로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190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병역기피자에 대한 사면 조치를 취하자 귀국하여 입대했다. 2년 뒤 제대해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했는데, 1911년 이탈리아가 쇠퇴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리비아를 빼앗으려는 전쟁에 들어가자 격렬한 반전운동을 벌이다 5개월 동안 투옥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듬해에는 사회당의 기관지인 <아반티>지의 편집장을 맡아 2년 만에 10배나 부수를 확장하는 성과를 보였다. 그의 자극적인 대중 선동글이 먹혀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 시절부터 무솔리니의 동료이자 연인으로 지내온 러시아 출신의 사회주의자 안젤리카 발라바노프는 “그는 사회주의 이론을 거의 몰랐으며 진지하게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은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에만 근거한 것이었다”라고 나중에 회고했다.
 
극우파로 변절, 그리고 로마 진군
 
그런 무솔리니의 성향은 1914년 10월에 명백해졌다. 이탈리아가 연합국 편에 서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방금까지 반전을 주장하던 <아반티>의 논조를 180도 바꾸어 참전을 독려하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사회당은 그를 출당시켰고, 무솔리니는 <포폴로 디탈리아>라는 신문을 스스로 창간해 우파적 주장을 펴다가 1915년 9월에 징집되었다. 그는 복무 중 잠시 휴가를 얻었을 때 오랫동안 동거해온 라켈레 구이디와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다시 전선에 복귀했을 때 부상을 당해 1917년 6월에 제대했다. 그가 이처럼 우파로 급전환한 까닭은 분명치 않으나, 사회주의를 억제하려는 자본가들의 후원을 국내에서는 물론 영국, 프랑스 등에서까지 받아낼 수 있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전후의 혼란과 갈등은 극우파의 온상이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timen to, 전투단)’라는 조직을 만들고 “사회주의와의 전쟁 선포”를 했다. 이 단체의 이름에 쓰인 ‘파시(단결)’에서 마침내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직 세력은 미약해서, 1919년의 총선에서는 무솔리니가 큰 표차로 낙선한 것을 비롯해 전투단 출신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낙심한 동료들에게 “걱정할 것 없어. 2년쯤 뒤면 멋지게 승리할 테니 두고 보라고”라며 격려했다. 그것은 예언이 되었다.
 
국회에 진입하지 못한 파시스트의 정치 행동은 테러였고, 폭력주의야말로 파시스트의 유일하게 확실한 정치강령이었다. 무솔리니는 1919년 4월에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아반티> 신문사를 습격해 무차별 파괴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자 집회나 본부를 습격하는 일이 이어졌으며, 이를 눈여겨본 자본가들이 뒷돈을 대기 시작하면서 파시스트의 세력은 급속히 늘어갔다.
 
미국의 재벌 J. P. 모건까지 무솔리니의 비밀 후원자 대열에 동참했다. 미래주의 예술가 마리네티 같은 지식인부터 퇴역 군인들, 그리고 단지 마음껏 날뛰기를 원하는 불량청소년까지 속속 파시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무솔리니의 천재적인 선동 연설이 큰 힘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현역 경찰이나 군인 중에도 파시스트가 늘어감에 따라 테러 진압도 어려워졌다.
 
1921년의 총선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138석, 국가 파시스트당(전투단이 정식 정당으로 개편되었다)은 당수 무솔리니를 포함해 35석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당, 공산당, 통일사회당으로 갈라져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었기에 정국의 주도권은 파쇼(파시즘) 쪽으로 기울었다. 루이기 파크타 수상은 장관직 몇 개를 주겠다며 그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무솔리니는 “수상직 말고는 필요없다”고 받아쳤다. 그리고 페라라, 볼로냐, 크레모나 등에서 폭력으로 사회주의 지방정부를 축출하는 ‘지방권력 쿠데타’를 거듭하며 북부 이탈리아를 차차 손에 넣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22년 10월 28일, 무솔리니는 “로마 진군”을 개시했다. 5만 명의 파시스트들이 로마를 향했다. 무솔리니 자신은 스위스와 가까운 밀라노에서 상황을 보았다. 혹시 실패하면 곧바로 스위스로 망명할 참이었다.
 
사실 실패할 뻔했다. 여러 길목을 따라 행진하던 파시스트들은 경찰의 저지로 대부분 발이 묶였고, 로마 외곽까지 도달한 인원은 9천 명 남짓했다. 여기에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하면 무솔리니의 꿈은 허망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계엄령을 승인해 달라는 파크타 수상의 요청을 거부했다. 왕이 그렇게 한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나, 군 내부에 숨은 파시스트가 많으므로 자칫하면 내전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파시스트들이 로마에 입성하고, 국왕이 수상직을 제의하자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침대차를 타고 단숨에 달려왔다. 그리고 10월 30일, 무솔리니 내각이 출범했다.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가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것이다.
 
헛된 제국의 영광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 의회를 위협해서 법률을 독자적으로 개정할 권한을 가짐으로써 “일 두체(Il Duce, 수령)”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선거 결과 가장 많이 득표한 정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선거법을 만들어 파시스트당이 영구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군대와 경찰 간부는 파시스트들로 채워졌으며, 집권 이전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행동대가 날뛰며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이나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했는데 복역 중이던 흉악범들 중에서 행동대 분대장들을 특채했다. 무솔리니는 “사납고 잔인한 자들이 좋다.…불굴의 기백을 가진 자들. 범죄자들 중에 쓸만한 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1924년 5월에 행동대가 정권의 비리를 고발한 사회당의 마테오티를 암살하자 맹렬한 반정부 운동이 벌어졌는데, 무솔리니는 언론을 검열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무차별 검거함으로써 대응했다. 또한, 1927년까지 지방자치제를 없애며 파시스트당 외의 모든 정당을 폐지하는 일련의 조치로 명실공히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탈리아 파시즘은, 같은 전체주의로 분류되는 독일의 나치즘이나 소련의 스탈린주의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파시스트당은 나치당이나 소련 공산당처럼 국가 위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이 아니었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하며 ‘열성 집단’을 박멸한다는 목표를 추진하지도 못했다.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힘을 유지했으며 이름뿐이라 해도 국왕과 그의 대권도 유지되었다. 이들은 21년 후 결국 무솔리니를 “용도폐기”하게 될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었다. 검은 셔츠(가리발디를 본뜬), 로마식 경례(단눈치오에게서 빌린), 원수 군복(그는 장교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등에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로,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해외 원정으로 그 허풍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 했다. 그래서 국제연맹 탈퇴를 불사하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1935년), 알바니아도 병합했으나(1939년) 이탈리아 군대의 허약체질은 개선되지 않아서 거의 두 손을 들고 있었던 알바니아를 점령하는 데도 한껏 힘이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에는 독일에게 압도당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고전했고, 그리스와 이집트 침공은 도리어 반격당해 독일군의 힘을 빌리는 치욕을 겪었다.
 
어릿광대의 최후
 
히틀러는 권력을 잡으며 무솔리니를 많이 본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아랫사람 대한 듯하는 관계가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력 차이와 나치와 파시스트의 국민 장악력 차이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어려움에부닥친 무솔리니를 여러 번 도와주었으나, 1939년의 ‘강철 협정’에 명시된 조항에도 불구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일 때 무솔리니와 협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며 히틀러가 무솔리니에게 바라는 것은 지중해 쪽에서 연합군을 막는 방패막이, 그리고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솔리니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소련 전선에 병력을 보내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고, 1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얼어붙은 땅에서 쓰러져갔다.
 
이렇게 되자 “공연히 히틀러의 전쟁에 말려들어, 막강한 미국, 영국, 소련과 적이 되면서 실리는 전혀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높아져 갔다. 화려한 쇼도 하루 이틀이지, “일 두체”의 황제놀음과 호언장담도 점점 식상해지고 있었다. 1943년, “비밀병기로 적들을 끝장낼 테니 두고 보라”는 무솔리니의 말을 비웃듯 시칠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로마에 폭탄이 떨어지자, 결국 파시스트 중에서도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24일,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측근이던 디노 그란디와 사위인 치아노 등이 앞장서서 무솔리니를 당수에서 끌어내렸다. 그 다음 날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이 그를 수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은밀한 곳에 가둬 버렸다.
 
21년이나 집권하며 그토록 많은 군중을 열광시켰던 무솔리니이건만, 권력을 잃은 그를 위해 나서는 이탈리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선 쪽은 독일인이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 쪽으로 돌아서면 곤란하다고 여긴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약 20개월 정도 북이탈리아의 살로에서 ‘살로 공화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었으며, 대부분의 결정은 독일이 내렸다. 무솔리니가 독자적으로 내린 몇 안 되는 결정 중에는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것도 있었다. 가장 사랑하던 딸, 에다는 남편인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했으나, 끝내 남편이 처형되자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내인 라켈레도 그를 떠난 상태였다. 늙고 지친 허수아비 독재자, 무솔리니에게는 오랫동안 그만을 사랑해온 연인, 클라라 페타치만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4월, 추축국의 패배는 가까워졌다. 연합군과 남부 이탈리아의 유격대는 힘을 합쳐 북진했다.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넘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탈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의 고빗길에서 유격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무솔리니를 처형했다. 전하는 말로는 유격대 대장이 권총을 겨누자 무솔리니는 “여기, 가슴을 쏴!”라고 외치며 코트를 열어젖혔고, 페타치가 그를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져,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무솔리니는 파시즘 국가를 처음 세웠지만, 오늘날 파시즘이라고 하면 그보다는 히틀러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군국주의를 내세웠지만 세계대전에는 소극적이었고, 인종 청소를 부르짖거나 대량학살을 벌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리라. 사실 그는 현대적인 독재자보다 고대의 폭군에 가까웠다. 로마 황제처럼 그도 개인숭배와 화려한 볼거리로 계급 분열이나 지역 갈등을 무마시키며 군림했다. 하지만, 로마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허약했고, 훨씬 강한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히틀러가 현대사를 뒤흔든 대악당이라면, 무솔리니는 어릿광대에 더 가까웠다.
 
 
글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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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20
    • 2534
  • 프란시스코 프랑코 (갈리시아 엘페롤) 1892.12.4 ~ 1975.11.20
  •   갈리시아 엘페롤 출생. 알카사르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부터 에스파냐령 모로코의 리프족(族)의 민족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활약하였고 1921년 장군이 되었다. 1928년 사라고사에 신설된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1931년 공화제가 수립되자 공화정부에 반대한 이유로 1933년 사관학교는 폐쇄되고 발레아레스섬으로 좌천되었다.   1935년 10월 무어인 부대와 외인부대를 이끌고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봉기를 진압, 참모총장이 되었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자 즉각 반(反)정부 쿠데타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정부에 의해서 카나리아제도(諸島)의 수비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7월 모로코로 가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얼마 후 반란군측의 주요인물이 사망 혹은 체포되었기 때문에 프랑코의 세력이 커져 10월 국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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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10
    • 2716
  • 호지명(호치민)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 1969년 9월 2일
  •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지만 어릴적 이름은 응웬 싱 콘이라고 불렀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개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베트남의 중부지방이며 행정구역은 응헤안주에 있는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훼이서 북쪽으로 360km떨어진 오지였으며 주변환경은 혹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평범한 지식인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훼에서 관직에 올랐지만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가지 못해 면직되었다(1929년 사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응웬 닷 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11년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1914~1919년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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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07
    • 3226
  • 마오쩌둥 1893년 12월 26일 (중국) - 1976년 9월 9일
  •   1967.1.8 반마오파가 제거되면서 중국의 문화혁명은 폭력혁명의 길로 달려갔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문화혁명의 정치적 열광이 정점에 이른 시기를 1967년 1월 8일 반마오파를 제거한 시점부터라고 보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른바 마오의 후반기 권력 독점이 시작되고 폭력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된 것이덩과 류가 제거된 시점부터라고 보는 것이다.   전대미문의 혁명, 엇갈리는 평가   문화혁명이 언제 시작돼서 언제 끝났는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단지 베이징(北京)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대대적인 도전을 시작한 1966년부터 마오의 추종자인 4인방 세력이 축출되고 마오가 사망한 1976년까지를 문화혁명 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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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05
    • 2325
  • 베니토 무솔리니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 1945년 4월 28일
  •   무솔리니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는 점은, 그에게는 도무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는 “무솔리니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고,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다가,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다. 그 자신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파시즘은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이탈리아의 불안   1870년, 중세 이래 천 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던 이탈리아는 마침내 통일되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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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01
    • 2303
  • 이오시프 스탈린 1879년 12월 18일 (조지아) - 1953년 3월 5일
  •   1907년 12월 5일, 지금은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지만 당시는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바쿠에서 한 여인이 티푸스로 죽었다. 예카테리나 스바드니제. 그녀는 약 2년 동안의 결혼생활 동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린 끝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그 남편은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기도 했었다. 아내를 묻는 자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긴 통곡 끝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간적인 감정도 죽고 말았네.” 그랬다.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이제는 2년 전 레닌이 붙여 준 스탈린(강철의 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 남자는 끝이 없는 비인간성으로 이후 46년의 세월을 살게 된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민의 피 위에, 강철의 제국을 건설한다.   러시아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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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1-28
    • 2674
  • 아돌프 히틀러 [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 1945년 4월 30일 ]
  •   1933.1.30 나치당 당수로서 독일 총리에 임명되다   1932년 히틀러는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이듬해인 1933년 1월 30일 제 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됐다. 이날을 가리켜 비극의 탄생이라고 해도 될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가 비로소 도래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누른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젊고 강력한 독일의 지도자에게 총리라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0년 만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것이다.총리가 된지 수년 만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총리가 되었는데, 무너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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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1-27
    • 1820
  • [세계의 독재자 73]
  • ▲ 영국 인명사전에서 분류한 세계 독재자 73명 [출처] [핏발울 배너 출처]   자유민주주의, 자유경제체제는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 독재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다양한 문화까지 부정하는 것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안전한 곳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더불어, 농부가 뿌린만큼, 일한만큼 수확하는 것이 당연하듯, 그 누구라도 자신이 일한 만큼의 댓가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의 수직적 사회이동이 보장되어있어야 꿈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겨난 이래로 여러 정치적 체제, 경제체제, 사회체제가 실험적이라 할 만큼 존재했습니다. 이 많은 여러 분야의 제도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체질에 어울리지 않는 체제나 제도는 자연스럽게 기피대상이 되며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법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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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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